부산일보 - 금정산성 역사와 함께한 '박정희 술'…대한민국 대표 막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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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락 맛홀릭] <10> 금정산성막걸리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하얀 병, 노란 라벨 하면 떠오르는 술이 있다. 부산 사람은 물론, 전국의 알 만한 술꾼들은 다 아는 그 술. VIP가 좋아해 ‘박정희의 술’로 불린, 바로 ‘금정산성막걸리’이다. 수백 년 역사의 부산 산성마을과 함께해 온 이 막걸리는 전통주를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한다. 우리나라 1호 민속주로서 전통을 굳건히 지키며 새로운 실험을 이어 가고 있는 부산 대표 술을 만나러 산으로 향했다.
■ 500년 역사 ‘전통누룩’
부산의 진산 금정산 한가운데, 해발 450m 산속에 자리한 마을. 금정구 금성동 산성마을에서 만난 유청길(65) (유)금정산성토산주 대표는 취재진을 먼저 누룩공장으로 안내했다. ‘누룩체험실’이라 적힌 현판 글자 위엔 할머니가 발로 누룩을 디디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체험실 안으로 들어서자, 현판 그림과 똑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몸빼 바지를 입은 아낙네 넷이서 찰흙처럼 보이는 통밀 반죽을 바닥에 놓고 연신 고무신으로 밟고 있다. 보자기에 싼 반죽을 뒤꿈치로 꾹꾹 눌러 디디자, 동그란 모양의 누룩 한 장이 뚝딱 만들어진다.
“항간에는 ‘족타식 누룩’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은 ‘족압식’입니다. 사람이 빙글빙글 돌면서 밟아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작업이에요.”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유 대표의 설명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누룩의 크기와 모양이 하나같이 똑같다. 수십 년 경력인 아낙들의 눈대중과 손발은 저울만큼 정확하다.
피자 도우 같은 누룩이 한 장 한 장 바닥에 깔리고, 어느새 고소한 향기가 작업장을 가득 채운다. 바로 옆 누룩방 문을 열자 양옆으로 층층이 누룩이 메주처럼 띄워지고 있다. 연탄불로 데운 누룩방은 섭씨 48~50도. 누룩마다 곰팡이꽃이 피어오르면서 한층 구수한 내음을 뿜어낸다.
누룩방에서 일주일 동안 띄운 누룩은 이틀 동안 햇볕에 널어 둔 뒤 창고에서 한 달 동안 더 건조시킨다. 누룩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만 무려 45일. 금정산성막걸리의 정체성이 이 전통누룩에 있다.
금정산성막걸리는 쌀과 누룩, 그리고 금정산 지하수를 정제한 물로 빚는다. 알코올 도수는 다른 막걸리보다 높은 8도. 전통누룩으로 빚은 막걸리답게 산미가 강하고 목넘김은 진하다 못해 걸쭉하다.
“아~ 진하다! 술은 이렇게 찐하게 잘 익어야 해요. 알코올의 쓴맛 때문에 아주 약간의 감미료가 들어가지만, 그래도 맛이 달진 않습니다.” 꿀떡꿀떡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켠 유 대표가 산성막걸리만의 매력을 설명했다.
금정산성막걸리는 2016년 농림부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됐다. 특히 전통누룩을 체험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 일본·중국·미국 등지에서 외국인 발걸음이 이어진다. 취재진이 방문한 날에도 후쿠오카에서 일본인 부부가 1년 전 맛본 산성막걸리의 비법이 궁금해 누룩공장을 찾았다고 했다.
이날 취재에 동행한 서일본신문 부산주재원 이와사키 사야카 기자는 “일본에서 파는 막걸리와는 달리 신맛이 강한데, 일본인이 좋아할 맛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 욕심보다 양심
금정산성막걸리는 산성마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조선시대 이 마을 사람들은 생계 수단으로 누룩을 만들어 팔며 술도 빚었다. 18세기 초 조선 숙종 때 금정산성을 축조하러 각지에서 몰려든 인부들이 마을의 막걸리를 맛보면서 전국으로 알려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산성마을을 자주 찾아 막걸리를 즐겼다. 한참이 흐른 뒤 산성막걸리가 밀주여서 단속 대상이라는 사연을 들은 박 대통령은 합법화를 지시했고, 대통령령을 통해 1979년 대한민국 1호 민속주 허가를 받게 된다.
집집마다 몰래 누룩과 술을 빚어 팔던 마을 사람들은 밀주의 굴레를 벗게 되자 뜻을 모았다. 159명이 참여해 금정산성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인 유한회사 ‘금정산성토산주’를 세웠다. 산성마을의 한가운데, 지금의 제1공장(본사) 자리다.
“바로 앞 개울에서 흙과 자갈을 퍼다가 양조장 건물을 지었어요. 당시 어른들의 채취와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본사를 계속 같은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금정산성막걸리는 한때 위기를 겪었다.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대표를 맡다 보니 체계적인 운영이 힘들었고, 술의 품질도 들쭉날쭉했다. 1997년 마을 어르신들의 요청으로 유 대표가 청년회장을 겸해 대표직을 넘겨받을 땐 상황이 심각했다. 하루 판매량이 말통 3개, 요즘 막걸리병 기준으로 고작 60병이었다.
반강제로 양조장을 떠맡게 된 30대 청년 대표는 정직과 양심을 앞세웠다. 쌀과 누룩, 좋은 원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적어도 5일 이상, 술이 완전히 발효된 뒤에야 시중에 내놨다.
“안 좋았던 상황을 바루는 데 10년쯤 걸리더라고요. 한창 전성기 땐 하루 1만 병도 넘게 나갔어요. 경기가 안 좋아도 5000~6000병은 꾸준히 판매됩니다.”
산성막걸리가 옛 명성을 되찾으면서 회사도 자연스레 성장했다. 2012년 제2공장, 2017년엔 3공장을 세웠다. 산성막걸리에 청춘을 바친 유 대표는 2013년 우리나라 49호, 막걸리 분야에선 최초로 ‘식품명인’이 됐다. 최근엔 대한민국 식품명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돼 책임이 늘었다.
■ 부산 술 × 부산 음식
현재 금정산성토산주가 만드는 술은 모두 3종이다. 8도짜리 ‘금정산성막걸리’와 도수를 6도로 낮춘 ‘금정산성막걸리 순(純)’, 그리고 최근에 개발한 ‘청탁’(5도)이다. 1·2공장에선 8도·6도, 3공장은 청탁을 생산한다.
“김치로 비유하면 8도짜리는 깊은 맛을 내는 묵은지, 6도는 갓 담근 김장김치, 청탁은 겉절이가 아닐까 싶어요.”
유 대표는 ‘묵은지’ 같은 막걸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소비자의 요구, 젊은 층 취향을 받아들여 7~8년 전 ‘김장김치’, 지난해엔 ‘겉절이’를 내놨다. 특히 청탁은 기존 산성막걸리와는 전혀 다른 맛이다. 일본에서 발효 공부를 한 유 대표 아들의 작품이다. 누룩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전통 옹기를 이용해 발효를 한다.
내년 초쯤 다음 작품도 준비 중이다. 청탁과는 정반대로 당을 완전히 뺀 순도 100%, 원주 그대로의 막걸리(15도)를 선보일 예정이다.
산성마을엔 몇 해 전부터 우후죽순 카페가 들어서고 있다. 이런 흐름을 거슬러 유 대표는 지난해 3공장 바로 옆에 ‘금정산성막걸리박물관’을 세웠다. 100평 규모의 공간엔 그가 전국을 돌며 모은 옛 농기구와 양조 설비가 전시돼 있다. 올 상반기 중 1차 오픈을 하고, 뒤편에 추가 전시공간을 지어 확장할 계획이다.
박물관에는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유 대표의 뜻이 담겼다. 술에 대한 생각도 비슷하다. “우리 술을 외국인 입맛에 자꾸 맞추려고 하는데, 한국식 전통을 그대로 이어 가야 버틸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유 대표의 집념에서 엿보이듯, 금정산성막걸리의 전통이자 대표술은 8도짜리다. 신맛이 강하다 보니 고기·전 등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린다. 산성마을은 흑염소먹거리촌이 형성될 정도로 흑염소불고기가 유명해 산성막걸리와 단짝이다. 현재 70여 곳의 식당에서 흑염소불고기와 오리·닭백숙 등을 판매한다. 흑염소불고기는 고기 껍질을 벗기고, 양념에 생강 등을 넣어 특유의 노린내를 잡았다. 모른 채 먹으면 소고기와 흡사한데 칼로리는 훨씬 높아 보양식으로 제격이다.
부산 대표음식인 동래파전 등 부침개류도 산성막걸리와 궁합이 좋다. 동래파전은 두툼해서 든든하고, 빈대떡은 가볍게 먹기 좋다. 동구 범일동 40년 전통의 ‘범일빈대떡’은 메뉴가 파전·빈대떡 딱 두 가지다. 매스컴에도 소개된 동네 맛집인데, 역시나 테이블마다 산성막걸리를 흔하게 기울인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동영상=김보경 PD harufor@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묵직한 산미와 살짝 쓴맛·단맛이 자연스레 어울려 밸런스를 이룬다. 기름진 음식에 알맞겠다.”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탄산에 보디감도 묵직하고, 끝맛은 고소함이 입안에 감돈다. 안 물리게 계속 마실 수 있을 듯.”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막걸리 하면 떠오르는 가장 기본적인 맛. 전통의 강자답게 파전·도토리묵 안주가 생각난다.”
▶이와사키 사야카 서일본신문사 기자
“산미가 강하고 뒷맛은 막걸리의 감칠맛이 남는다. 일본에서 판매되는 막걸리에는 없는 맛이다. 2~3년 전부터 마시는 식초가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데, 신맛이 강한 이 막걸리도 일본인이 좋아할 맛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누룩의 컬러가 술에 고스란히 반영돼 어두운 톤의 베이지 색깔을 띤다. 지게미 함량이 많아 잔에서 묵직함이 느껴진다. 향 자체도 무게감이 있다. 누룩·곡물·땅콩껍질·흙·연근 등 뿌리채소의 향이 느껴진다. 컨디션이 좋을 때의 금정산성막걸리는 경쾌한 산미와 함께 투박하면서도 매력적인 야성미가 느껴지는데, 맛의 변화가 잦은 편이라 매번 맛볼 때마다 이전 맛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된다. 특유의 산미 밸런스가 쨍하고 맛있게 다가오는 날에는 양은잔에 연거푸 들이켜게 된다.”
-제품명 : 금정산성막걸리
-양조장 : (유)금정산성토산주(부산 금정구)
-내용량 : 750mL
-알코올 : 8.0%
-원재료 : 쌀·누룩·정제수·감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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