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다고 일본누룩 쓰는 한국 막걸리, 이건 아니지요”(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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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막걸리 다큐’ 도전 이창주 감독이 말하는 ‘막걸리’
자타가 인정하는 막걸리 전문가 이창주 다큐멘터리 감독(64)은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 4개월이 넘었다. 1년 동안 어떤 술도 마시지 않는 절제를 한 뒤 다시 전국의 막걸리를 마시고 싶어서다. 사실상 원점에서 막걸리의 ‘참맛’을 느껴 보겠다는 생각이다.
막걸리를 즐기던 애호가였던 그는 한국의 전통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막걸리의 길로 들어섰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나라 고유의 막걸리가 없어지고 있는 세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막걸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하겠다고 나선 이유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영상 공부를 하던 1980년대 후반 막걸리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했다. 가족이 300년 전 조선에서 건너온 후쿠이 할머니를 통해 일본에서는 한(恨)일 수밖에 없었던 막걸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 끌려온 조선 사람들의 유일한 낙은 고향에서 먹던 막걸리를 마시며 향수에 젖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집에서 막걸리를 만들어 마셨다. 하지만 이 막걸리가 집안을 망가뜨리는 화근이 되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간토 대지진 때 조선 사람을 간별해 대량 학살할 때 집을 뒤져 막걸리가 있으면 가족을 몰살시켰다. 막걸리는 조선 사람은 마시고 일본 사람은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쿠이 할머니도 똑같이 당했다. 외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으로 어머니가 빚은 막걸리를 아버지가 즐기고 있었다. 후쿠이 할머니가 어린 시절 동네에서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그게 화근이 돼 아버지가 비명에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후쿠이 할머니는 그때부터 막걸리를 더 귀하게 여겼다. 막걸리를 두 손으로 기도하듯 소중하게 마셨다. 이후 전통 누룩이 사라져 한국 토종 막걸리를 마실 수 없었다. 이 감독이 토종 막걸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시발점이 됐다.
1997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 감독은 2000년대 중반 문화체육관광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지원하는 기금으로 일본 방송에 한국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 기회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막걸리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일본에서 한류 스타가 뜨고 막걸리 열풍이 일면서 시작한 ‘한류 프로젝트’였다.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국내에서도 일본에서 시작된 막걸리 열풍이 역으로 들어와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점이었다.
2005년부터 3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 음식과 문화, 막걸리 공부에 들어갔다. 전국 군이나 읍 단위로 2, 3개의 막걸리가 있었다. 3000여 종류의 막걸리가 존재했다. 하지만 대표성을 가진 막걸리는 10여 개로 좁혀졌다. 부산, 경남 진주 창원 산청, 전남 여수, 전북 전주 정읍 남원 무주, 경북 안동 봉화 울릉, 제주…. 전국을 돌면서 맛있는 막걸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두 가지라는 점을 파악했다. 누룩과 물. 둘 다 지역적으로 다 달랐다. 막걸리 맛이 다 다른 이유였다.
2007년 ‘한국의 맛과 멋’을 주제로 일본 방송에 제공할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한국 전통 막걸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제작했다. 당시 한국 전통 음식과 문화 등 TVK에 50부작을 만들어 수출할 때 막걸리도 포함시킨 것이다. 2008년 요코하마TV에서 방영할 ‘한국의 맛과 멋의 재발견’이란 다큐멘터리 시리즈 30부작을 제작할 때도 55분짜리 전통 막걸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08년을 전후로 ‘국민술’로까지 칭송되던 막걸리의 인기가 가파르게 하향 곡선을 그리면서 막걸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매출이 떨어지자 그나마 전통 방식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도가들도 입국(粒麴)을 쓰기 시작했다. 입국은 일본 누룩이다. 다양성이 생명인 막걸리가 ‘획일적인 맛’으로 가고 있었다. 일본 후쿠이 할머니가 한국에서 수입된 막걸리를 처음 마신 뒤 한 말이 “한국의 맛이 아니다”였다. 대부분 입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저마다 독특한 맛을 자랑했지만 향료를 쓴 것에 불과했고 만드는 과정은 ‘입국식’이었다. 전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현실은 토종 막걸리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막걸리는 소주 맥주보다도 싸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가격을 소주나 맥주 값보다 높게 설정하면 팔리지 않았다. ‘싼 술’ 이미지가 막걸리 도가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비용을 절감해야 했고 가성비가 높은 입국을 쓰게 된 것이다. 입국은 가격이 쌌다. 막걸리 제조 과정을 앞당길 수 있고 맛도 고르게 유지할 수 있었다. 토종 누룩은 균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막걸리를 제조하는 과정도 까다롭다. 제조 과정에서 자칫 실수하면 술맛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도가가 입국을 선호하게 된 배경이다.
한국 토종 누룩으로 만들지 않은 막걸리가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술인가. 그때부터 이 감독은 토종 막걸리의 우수성을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제대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국충길(麴t길)의 누룩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다. 누룩 국, 깊을 샘 충, 맛좋은 물 길. 한국 토종 누룩과 좋은 물로 막걸리를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통을 고수하는 막걸리를 살리는 국충길이란 인물을 내세워 토종 누룩의 역사와 우수성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500년 넘은 토종 누룩을 쓰는 금정산성막걸리가 전통을 어떻게 이어왔는지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부산 동래에 살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쿠이 할머니와 그의 후손들도 등장한다. 후쿠이 할머니가 전 재산을 털어 ‘한국의 막걸리’를 만들라고 하는 스토리가 가미된다. 부산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갈라진 ‘토종 막걸리’의 후손들이 전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논픽션에 픽션을 가미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토종 막걸리가 온갖 세파 속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그린다. 시나리오도 완성됐다.
“누룩은 귀신이다. 누룩은 그 집안과 함께 산다. 그런데 누룩이 없어지다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귀신을 마셔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 귀신을 마시고 있다. 입국만 계속 쓰면 한국 전통 막걸리는 다 사라진다.”
이 감독은 국내에서 크게 3개 도가만 토종 누룩을 쓰고 있다고 했다. 금정산성막걸리와 송명섭막걸리, 그리고 경남 산청 일대에서 밀주를 담는 할머니들. 특히 이 감독이 금정산성막걸리에 꽂힌 이유는 대를 이은 희생과 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500년 가까이 전통을 이어오던 금정산성막걸리는 1960년대 들어 정부가 쌀 부족을 이유로 누룩 제조를 법으로 금지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던 사람들이 다 포기했다. 하지만 금정산성막걸리 유청길 사장의 어머니만 몰래 누룩을 만들었다. 땅굴을 파서 숨기면서 ‘전통’을 이었다. 1980년 민속주 제도가 생기면서 합법적으로 막걸리를 빚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금정산성막걸리는 ‘민속주 1호’가 됐다. 어머니가 “막걸리는 돈이 안 된다”며 말려 직장을 다니던 유 사장은 1990년대 말 ‘전통’을 잇기 위해 막걸리의 길로 들어선다. 토종 누룩을 비싼 값에 팔라는 일본 기업의 요구를 “매국노가 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외로운 길을 가고 있다.
토종 누룩으로 만든 막걸리는 유산균이 많다. 금정산성막걸리는 시간이 갈수록 요구르트 화가 되고 나중엔 식초가 된다. 국내에서 식초가 되는 막걸리는 드물다. 유산균이 많은 막걸리와 소주를 동물의 위에 한 달 동안 보관하는 실험을 했는데 막걸리를 담은 위는 위벽이 두꺼워졌고 소주를 담은 위는 위벽이 헐었다는 결과도 있다.
이 감독은 8년 전 노인들의 삶이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강원 정선을 찾았다 아예 정착했다. 물 좋고 공기 맑은 그곳에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막걸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가다듬었다. 시나리오를 보충하고 사재도 털고 펀딩을 해 배우들까지 섭외했다. 촬영을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적어 펀딩하기 힘들었지만 이제 촬영만을 남겨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제동이 걸렸다.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이 주연은 영화배우 송강호 씨로 해야 한다고 했다. 서민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단다. 그런데 송강호 씨가 누구인가. 국내 톱스타가 아닌가.”
고작 10억 원짜리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톱스타를 동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감독은 금정산성막걸리 유청길 사장을 주연으로 쓸 생각이었다. 유 사장에게도 이미 통보했다. 하지만 사라져 가는 토종 막걸리를 살리기 위해 나선 길, 흥행도 생각해야 했다.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막걸리 다큐멘터리 영화는 내가 만든다기보다는 막걸리 애호가들이 만드는 것이다. 토종 누룩 막걸리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 ‘국충길’이 될 수 있다. 전통 막걸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의 제작자이다.”
이 감독은 학창 시절 음악과 비디오에 미쳐 살았다. 존 레넌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등 컨트리가수 음악에 빠져 있었다. ‘인스턴트 카르마’, ‘이매진’, ‘헬프 미 메이크 잇 스루 더 나이트’…. 당시 앨범에는 비디오도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비디오를 보면서 영상에 관심을 가졌다. 청년 시절 부산에서 DJ와 신문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8년 당시 부산에서 가장 좋았던 AID 아파트를 사서 독립하라며 어머니가 주신 800만 원을 몽땅 비디오 장비에 투자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후쿠이 할머니를 만나면서 막걸리와 연을 맺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며 작곡가 고 박춘석, 길옥윤 씨의 음악저작권을 관리했고 한국음악산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90년대 말 한류 붐이 일었을 때 문체부 지원으로 음반한류 기획자로 한국 대중음악을 소개하는 CD 25만 장을 찍어 전 세계에 배포하는 일도 했다. 음반과 영상을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엔 후쿠이 할머니와 금정산성막걸리가 늘 맴돌고 있었고 이제야 막걸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게 됐다.
정선=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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